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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전설의 서막

75년 전, 페라리 125 GPC는 F1 의 전설의 되기 위한 시동을 걸었다.
글: 다비데 마르키(Davide Marchi)

1.5리터 12기통 엔진을 장착한 125 GPC는 단 세 번의 출전 만에 승리를 거두었다. 1949년엔 125 F1으로 이름을 바꾸고 기록적인 역사를 써내려 갔다.

원래 이름인125 GPC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차량은 F1보다 먼저 탄생했다. GPC라는 세 글자는 Gran Premio Compressore(Grand Prix Compressor, 그랑프리 컴프레셔)를 의미했는데 볼류메트릭(Volumetic) 슈퍼차저가 장착됐고 포뮬러 그랑프리에서 경주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포뮬러 그랑프리는 포뮬러 1의 전신으로, AIACR(국제자동차공인클럽협회, 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Automobile-Clubs Reconnus –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Recognised Automobile Clubs, 현재의 FIA)이 발족했다.

1948년 가르다 GP에서 페라리 125 GPC를 몰고 우승을 차지한 쥬세페 '니노' 파리나(Giuseppe ‘Nino’ Farina)

125 GPC는 나중에 125 F1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차는 스쿠데리아 페라리가 만든 최초의 싱글시터로, 75년 전 데뷔했다. 그랑프리 시리즈는 1921년에 창설되었고, 이듬 해 공식적으로 규정이 만들어졌다. 완벽한 스타팅 그리드를 갖춘 시리즈의 첫 번째 레이스는 1922년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서킷에서 열린 프랑스 그랑프리다. 이 때 펠리체 나자로(Felice Nazzaro)가 운전한 FIAT 804가 우승을 거두었다. 페라리는 이보다 훨씬 후인 1948년에 시리즈에 데뷔했다.

1947년, 스쿠데리아는 125 S로 대부분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레이스에 참가했다. 125 S는 클로즈드 휠 스포츠카로 마라넬로에서 만들어진 차 중 레이싱에서 승리를 거둔 최초의 차량이기도 하다. 이 승리는 프랑코 코르테즈(Franco Cortese)가 테르메 디 카라칼라(Terme di Caracalla)서킷에서 거둔 것이다.

그 해 첫 번째 레이싱 시즌이 끝날 무렵, 엔초 페라리는 싱글시터 레이싱이 제공하는 위신과 명성 그리고 기민한 사업적 행보를 위해 스쿠데리아 페라리가 싱글시터 레이싱에 주력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페라리는 1947년 단 한 대가 아닌 두 대의 오픈 휠 스포츠카 개발 작업에 착수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차량이 166 F2와 125 GPC다. 166 F2는 F2를 겨냥한 모델로 많은 프라이버티어 드라이버들이 이 차를 타고 레이싱에 참가했다.

루이지 빌로레지(Luigi Villoresi)가 1949년 영국 실버스톤 서킷에서 코너를 돌고 있다.

125 GPC는 1.5리터 12기통 엔진으로 구동되었으며, 1948년 9월 5일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데뷔했다. 토리노의 파르코 델 발렌티노(Parco del Valentino)에서 열린 이 레이스에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세 대의 싱글시터를 출전 시켰는데 이 차량들은 각각 두명의 전문 드라이버와 태국 귀족 출신의 젊은 드라이버가 운전대를 잡았다.

당시 경기에서 페라리는 4, 5위로 레이싱을 마치긴 했지만, 125 GPC의 첫 번째 승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루어졌다. 그 해 10월 27일, 가르다 서킷(Circuito del Garda)에서 스쿠데리아는 단 한 명의 드라이버를 출전시켰다. 드라이버의 이름은 파리나(Farina)였다. 그는 그리드를 지배했던 이탈리아 선수들을 제치고 경기를 리드해 갔다. 이렇게 125 GPC는 단 세 번 출전 만에 첫 번째 승리를 따냈다. 1949년 시즌을 준비하기 위해서 차량은 여러 변화와 개선을 거쳤다. 현재 125 F1으로 알려져 있는 이 차는 루트(Roots) 슈퍼차저 두 개와 실린더뱅크 당 하나의 오버헤드 캠샤프트를 탑재하여 엔진의 출력을 높였다.

이러한 새로운 구성으로 개선된 125 F1은 포디움 혹은 우승을 달성하기 시작했다. 한편, 새로운 포뮬러1 월드 챔피언십의 개시가 발표되었고,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참가에 관심을 보인 첫 번째 팀들 중 하나였다.

알베르토 아스카리(Alberto Ascari)는 1949년 이탈리아 GP에서 피트 스톱을 하면서 125 F1 운전에 대한 솔직한 피드백을 제공한다.

하지만, 대회 상금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에 페라리는 1950년 5월 13일 실버스톤(Silverstone)에서 열린 챔피언십의 첫 번째 대회에 출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주일 후, 모나코에서 열린 두 번째 경기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스카리(Ascari)는 여기서 2위로 피니시 라인을 넘었다.

이런 성공에도 불구하고, 125 F1이 스쿠데리아의 팀으로 세계 최고의 레이싱 시리즈에서 경쟁을 벌인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엔초 페라리가, 후안 마누엘 판지오(Juan Manuel Fangio)와 몬테카를로에서 우승한 알파 로메오(Alfa Romeo)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강력하고 완전히 새로운 차가 필요하다고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페라리는 곧바로 작업에 착수해 불과 몇 달 만에 두 대의 새로운 차를 준비했다. 첫 번째는 3.3리터 대형 엔진을 탑재한 275 F1이었고, 그 다음은 훨씬 더 큰 4.5리터 엔진을 가진 375 F1였다.

1948년 스위스 그랑프리에서 알베르토 아스카리(Alberto Ascari)의 페라리 125 F1이 선두를 달리고 있다.

125 F1은 약 50번의 레이스에 참가해 8번 우승을 차지했으며 포디움에는 15번 올랐다. 그 이후 75년 동안, 많은 페라리 차량이 컨스트럭터와 포뮬러1의 역사에서 영광스러운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시작엔 1948년 125 GPC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125 F1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