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쿠데리아 페라리팀의 위대한 기술 디렉터였던 마우로 포르기에리(Mauro Forghieri)는 1979년에 이미 반자동 변속기에 대한 실험을 진행한 적이 있다. 해당 변속기는 고압식 유압 시스템을 사용했으며, 테스트 드라이버는 다름 아닌 질 빌뇌브였다. 프랑스계 캐나다인 스타 드라이버였던 그는 피오라노 서킷을 100바퀴나 주행했음에도 일반 수동 변속기의 순수함이 더 좋다고 판단했다.
페라리는 1989년형 640 F1 레이스카에 자동화 변속기를 도입했는데 그 기술적 대담함은 시즌 개막전이자 데뷔전이었던 브라질 그랑프리에서의 우승이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순탄한 항해만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1990년대 중반, 그리드의 모든 팀이 유사한 시스템을 도입하게 된다. 이는 F1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변화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페라리는 이후 공도용 차량에 사용할 유사한 원리의 시스템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초기 버전은 전자 기계식 액추에이터(electro-mechanical actuator)의 전자 제어가 가능한 자동 클러치를 사용했다. 본 시스템은 1992년에 마지막으로 생산된 약 100대의 몬디알 T 모델에 장착됐다.
페라리의 패들시프트 기어박스가 어떻게 실패할 뻔한 기술에서 업계 표준이 되었는지 알아보자
엔지니어 파올로 마르티넬리(Paolo Martinelli)는 해당 기술이 가진 잠재력을 발견했고, 클러치뿐만 아니라 변속기에서도 작동이 가능하도록 차량을 개조했다. 마르티넬리가 1994년부터 F1 팀의 엔진 개발 부문을 맡게 되면서 그의 동료였던 클라우디오 롬바르디(Claudio Lombardi)가 개발을 이어갔다. 그는 피아트그룹 및 전자 부문 파트너인 마그네티 마렐리(Magneti Marelli) 소속 연구원들을 팀에 합류시키며 연구 규모를 점차 확장시켰다. 이후 인근에 위치해 있던 볼로냐 대학교의 소프트웨어 전문가들도 개발 과정에 참여했다.
1997년형 355 F1은 기술적 개선과정을 거친 페라리의 베스트 셀러이자 이 새로운 시스템을 탑재한 최초의 로드카였다. 당시 짜릿한 주행경험을 선사하던 6단 수동 변속기가 존재했기에, 스티어링 칼럼에 두개의 패들 시프트가 등장하고 전통적인 H패턴 오픈 게이트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일부는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현재 진행 중인 인공지능에 대한 여러 논쟁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듯이 인간은 변화에 대한 기대감과 경계심을 함께 가지고 있는 존재다.
페라리는 포뮬러 원에서 먼저 도입한 반자동 변속기를 몬디알을 통해 도로용 모델로 확장했다. 이후 355 F1이 패들 시프트 컨트롤을 추가하며 본격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사실 변속기 자체는 기존의 것과 동일했다. 하지만 운전자가 클러치 페달을 왼발로 밟지 않아도 유압 시스템을 통해 변속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패들의 모양은 네덜란드 델프트(Delft) 대학교 소속 인체공학 전문가 팀의 연구를 통해 최종 결정되었다. 시프트 패들은 계기판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크게 제작되었다. 또한 시프트 패들을 스티어링 칼럼에 고정함으로써 운전자가 스티어링 휠의 회전 각도에 상관없이 쉽고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이 반자동 시스템은 모든 고성능 차량에 적용되고 있다. 기어 변속이 훨씬 빠르고(0.15초) 운전자의 몰입감과 집중력을 높이는 동시에 더 높은 토크 부하를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완전한 자동 변속기보다는 자동화된 수동 변속기에 가까웠기 때문에 기존의 수동 변속기 차량을 운전하듯 조작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주행 방법이었다.
이후 소프트웨어 및 기술의 빠른 발전과 함께 30년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수준으로 변속 시간이 단축됐다. 하지만 가장 먼저 그 길을 개척한 것은 다름아닌 페라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