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

신화 속 숨겨진 이야기: 하이브리드

글: 제이슨 발로우(Jason Barlow)

KERS(Kinetic Energy Recovery System, 운동 에너지 회수 시스템)은 2009년 포뮬러 원에 처음으로 도입됐다. 본 시스템은 제동 시 손실되는 에너지를 회수해 배터리에 저장함으로써 운전자가 짧은 시간 동안 연료 소모 없이 출력을 보태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페라리는 레이스에서 검증된 혁신을 양산차에 접목해 온 브랜드이며, 이 기술 역시 예외는 아니다. 2010년 제네바 모터쇼에서는 아이코닉한 차량들이 전시된 페라리 부스에 이례적인 신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599 Hy-Kers였다. 이 모델의 핵심은 차량 후방의 듀얼 클러치 7단 변속기에 연결된 고전압 3상 전기모터였다. 제동 과정에서 손실된 에너지를 회수해 차량 바닥에 위치한 리튬 이온 배터리를 충전했다. 이 시스템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35%까지 줄였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하이브리드 기술을 통해 차량의 성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험하는데 있었다. 개발팀은 하이브리드 시스템의 추가적인 무게와 이에 따른 랩 타임 기록 사이의 상충 관계를 검토하는 등 여러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페라리가 F1과 내구 레이스, 도로 위까지 하이브리드 기술을 어떻게 활용해왔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3년 후 같은 모터쇼에서 데뷔한 라페라리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비록 자연흡기 방식의 6.2리터 V12 엔진이 가장 큰 주목을 받았지만, 163cc의 전기모터 또한 F1과 비슷한 수준의 효율성과 토크 밀도를 갖추며 기술적 놀라움을 선사했다. 이 전기모터는 기어 세트를 통해 변속기 후방에 연결되었고, 두 개의 전력 인버터가 변속기 하우징 상단에 장착됐다. 또 하나의 보조 전기모터는 기존의 알터네이터를 대체하면서 차량의 무게를 줄이는데 기여했다.

고전압 배터리 팩은 8개의 모듈로 분할된 120개의 셀로 구성됐으며, 페라리 F1 레이싱 부서에서 직접 조립했다. 배터리 팩은 케블라(Kevlar) 소재의 케이스 내부에 장착됐고, 유리 층을 통해 캐빈과 분리됐다. 이와 함께 탑재된 두 개의 인버터와 직류 컨버터가 전력 공급을 제어함으로써 내연기관과 전기모터를 매끄럽게 통합했다.

라페라리는 963마력의 최고출력을 발휘하며 일반적인 차량의 성능 지표를 단숨에 뛰어넘었다. 특히 하이브리드 시스템 덕분에 시속 70km에서 120km까지의 가속 시간은 단 3.4초로, 7.2초를 기록한 엔초보다 두 배나 빨랐다. 순간 반응성도 놀라웠다. 4단 2,500rpm에서 가속을 시작해 전체 출력의 90%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걸린 시작은 고작 0.1초였다. 진정한 ‘즉각적인 반응성’이라 할 수 있다.

599 Hy-Kers 콘셉트는 F1의 KERS 기술이 어떻게 로드카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이후 등장한 SF90 스트라달레는 페라리 최초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모델이다. 순수 전기 모드인 e드라이브에서는 최대 25km까지 주행이 가능하다. 780마력의 4.0리터 트윈 터보 차저 V8 엔진과 217마력의 추가 출력을 제공하는 세 개의 전기모터의 결합으로 무려 1,000마력에 이르는 합산 최고출력을 발휘한다. 최근 자동차 산업은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SF90의 정교한 제어 로직은 이와 같은 트렌드를 선도하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기술은 결국 핸들링과 퍼포먼스를 극대화하기 위한 요소다. 예를 들어 앞 차축의 토크 벡터링 시스템이나 일반적인 방식으로 엔진을 제어하지 않고 운동 에너지를 투입해 미끄러짐을 제어하는 전자식 트랙션 컨트롤은 모두 같은 목적을 위해 작동한다.

전기모터가 만들어내는 회생 제동량에 필요한 브레이크-바이-와이어 시스템도 적용됐다. 일반적인 마찰 브레이크와 회생 제동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조율하는 것은 고성능 하이브리드 차량이 직면하는 가장 큰 기술적 과제 중 하나지만 SF90은 이를 완벽히 해결했다.

페라리가 하이브리드 기술 개발을 지속하면서 기술 요소간의 조화도 더욱 정교해지고 있다. 296 GTB를 예로 들어보자. 2.9리터 V6 터보 엔진은 120o핫 V 구조로 배치되어 차량의 폭이 넓어졌고, 이 결과 차량의 무게중심이 개선됐다. 내연엔진은 단독으로 663마력의 출력을 발휘한다. 이는 8단 듀얼 클러치 변속기 및 전자식 디퍼렌셜과 연결되어 있으며, 차량 후방에 장착된 167마력의 전기모터와 통합되어 ‘퀄리파잉(qualifying)’ 모드에서 830마력의 출력을 제공한다. 엔진과 전기모터는 두 파워 유닛 사이에 위치한 추가 클러치를 통해 매끄럽게 결합된다. 순수 전기 주행 모드에서는 클러치가 이를 분리한다. 7.45kWh 고전압 배터리는 전기모터에 전력을 공급한다.

페라리의 첫 하이브리드 F1 카는 2009년에 데뷔했다. 하이브리드화는 2013년 라페라리부터 페라리 로드카를 더욱 강력하고 효율적으로 만들어왔다

페라리는 TMA(transition manager actuator)라는 장치를 통해 전기모터와 내연엔진 사이의 에너지 흐름을 최적화한다. 이와 함께 페라리만의 독자적인 소프트웨어가 이 전환이 매우 매끄럽고 즉각적으로 이뤄지도록 돕는다. 그 결과 자연흡기 엔진과 비슷한 수준의 응답성을 경험할 수 있으며 사운드 또한 인상적이다. 여러 기술적 제약을 고려할 때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조용한 e드라이브 모드에서 조차 이상할만큼 짜릿한 주행이 가능하다.

최근 자동차 업계에서 ‘다운사이징’이 주요 트렌드로 자리 잡았지만, 어쩌면 ‘적정 사이징(right-sizing)’이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르망 내구 레이스에서 2연승을 기록한 페라리 499P에는 680마력의 3.0리터 트윈 터보 V6 엔진이 탑재돼 있는데, 앞 차축에 위치한 전기모터를 통해 272마력의 추가 출력을 발휘한다. 또한 세계 내구 레이스 챔피언십(WEC)의 규정에 따라 시속 190km 이상에서 사륜구동으로 전환된다. 본 기술은 신형 F80 슈퍼카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실제로 F80에는 유사한 파워트레인이 탑재됐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단 2.15초, 시속 200km까지는 5.7초만에 도달하며 최고 속도는 시속 350km로 제한된다. 얼마나 경이로운 반응성인가.

F80은 르망 우승을 차지한 499P에서 직접적인 기술을 차용했으며,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포함해 1200마력을 발휘한다

F80의 시스템 합산 출력은 1,200마력으로 이 중 900마력은 내연엔진에서, 나머지 300마력은 하이브리드 시스템에서 생성된다. 트윈 터보와 함께 전기모터가 터빈 및 컴프레서 사이에 장착돼 있어 터보 랙을 줄이고, 더욱 빠른 부스트 반응을 이끌어낸다. 페라리의 하이브리드 기술은 599 Hy-Kers 대비 비약적인 진보를 이뤄냈는데, 페라리가 자체적으로 설계 및 생산한 F80의 경량 전기모터가 이를 증명한다. 토크 벡터링과 사륜구동 구현을 위해 앞 차축에 2개, 뒷 차축에 1개의 전기모터가 장착돼 있다. 앞 차축에 통합된 인버터는 양방향으로 작동하는데, 이는 회생 제동 시 차축에서 생성된 교류가 배터리 충전을 위한 직류로 변환된다. F1에서 파생된 MGU-K리어 모터의 무게는 8.8kg로 30,000rpm까지 회전한다. 이는 내연엔진 시동, 고전압 배터리 재충전을 위한 에너지 회수, 특정 동적 조건에서 엔진 토크 보완이라는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고전압 배터리 또한 F1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204개의 리튬 셀은 3개의 모듈로 나뉘어 탄소섬유 케이스에 장착됐으며, 차체 하부에 낮게 배치돼 차량의 무게중심을 최적화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배터리, 인버터, 파워 모듈 등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모두 아우르는 페라리의 높은 기술력 덕분에 기존 라페라리 차량에도 최신 사양의 배터리를 장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페라리의 모든 하이브리드 모델에는 8년 연장 보증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기술의 조화가 완성된 셈이다.

[오프닝 이미지: 2023년형 페라리 499P]